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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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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응은 후한 시대의 인물로, 효렴으로 추천되어 청주 자사까지 올랐으며, 선비족을 격퇴하는 등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남윤으로 재직하며 환관 장삭을 처벌하고, 당고의 금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석방되었다. 이후 장락소부로 등용되었지만, 환관 세력에 의해 다시 야인이 되었고, 장검의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이찬은 조조를 높이 평가하여 아들에게 조조에게 의탁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응의 전기는 《후한서》 권67, 〈열전〉57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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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 (후한)
기본 정보
이응의 초상
이응의 초상
이(李)
이름응(膺)
원례(元禮)
시호원양(元陽)
작위동향후(東鄕侯)
생몰년? ~ 169년
시대후한
출신지영천군 양적현(현재의 허난성 위저우시)
관직태수(太守)
사례교위
봉사동향후(東鄕侯)
가계
조부이우(李禹)
아버지이모(李模)
가족 관계
아들이전(李전)
이도(李도)
인물 정보
관련 인물장검
두밀
범방
곽태
채옹
원굉

2. 생애

이응은 효렴으로 추천되어 사도 호광에게 초청받아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청주 자사까지 승진했다. 그의 지휘 아래 있던 태수현령은 그의 위엄과 통찰력에 두려워하여 많은 수가 사임했다. 이후 어양 태수, 촉군 태수로 영전했지만, 어머니가 고령이라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잠시 후 호오환교위가 되었고, 선비족이 자주 변경을 침입했지만, 그때마다 격퇴하여 선비족은 그를 몹시 두려워했다. 그러나 공무 사건으로 면직되어 륜씨로 돌아가 서당을 열어 가르쳤는데, 가르침을 청하는 자가 항상 천 명 정도였다. 후한의 순상은 그를 만나 그 자리에서 그의 어자를 맡았고, 집에 돌아와 기뻐하며 "오늘 처음으로 이군의 어자가 되었구나"라고 말했다.

영수 2년 (156년)에 선비족이 다시 운중을 침략하자, 환제는 이응이 유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불러 도료장군에 임명했다. 강족, 소륵, 구자 등 서방의 여러 부족이 자주 침략하여 장액, 주천, 운중의 여러 군의 백성들이 고통받았는데, 이응이 도착하자 오랑캐들은 공격 전에 끌고 간 남녀를 모두 변경으로 돌려보냈다. 이로 인해 이응의 명성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159년, 이응은 소환되어 하남윤에 임명되었다. 완릉의 호족 양원군이 관물 횡령 죄를 짓고 사치스럽게 꾸민 물건들을 가져가려 하자, 이응은 상소를 올려 양원군의 죄를 조사하려 했다. 그러나 양원군은 환관에게 뇌물을 보내 오히려 이응이 죄를 묻게 되어 좌교에서 고역 죄인이 되었다. 사례교위 응봉이 이응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려, 이응은 형을 면제받고 다시 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환관 장양의 동생 장삭이 야왕 현령으로 있으면서 임산부를 죽이는 등 악행을 저지르자, 이응은 이졸을 이끌고 장삭을 잡아 죽였다. 장양은 황제에게 동생의 무죄를 호소했지만, 황제는 장양에게 "이것은 네 동생의 죄다. 사례가 한 일, 아무것도 잘못된 게 없다"라고 말하고 내쫓았다. 이 일이 있은 후 황문, 상시 (모두 환관)는 모두 허리를 굽히고 숨을 죽였으며, 휴가일에도 후궁 숙소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황제가 이상하게 여겨 묻자, 모두 "이 교위님(이응)이 무서워서요"라고 말했다. 당시 조정에는 환관이 횡행하여 정치와 질서가 엉망이었지만, 이응만은 자신의 신의를 지켰다. 선비로서 그의 출입이 가능한 자가 있으면, "'용문에 등용되었다'(등룡문)"고 불렀다.[3]

166년, 1차 당고의 금이 일어나 성진 등이 살해되고, 이응을 포함한 200여 명이 투옥되었다. 167년 이응은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1] 몇 달 후 환제가 죽고 진번이 태부가 되고 대장군 두무와 함께 정치를 맡게 되자, 이들은 환관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이응은 장락소부가 되었으나, 168년 두무, 진번 등이 살해되고 이응은 다시 야인이 되었다.[1]

169년, 장검의 사건으로 당인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고향 사람들은 이응에게 피신을 권했지만, 이응은 "임금을 섬기면서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죄가 있으면 형벌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절개이다. 나는 이미 예순인데,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 도망가서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조옥에 자수했다. 그는 고문을 받고 죽었으며, 그의 처자식들은 변방으로 이송되었고, 문인, 하인, 부형들까지 금고형에 처해졌다.[1]

이응의 아들 이찬은 동평군 동평국의 상(相)을 지냈다. 이찬은 조조가 아직 미천하던 시절, 조조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임종 시 아들 이선(李宣) 등에게 "세상이 곧 혼란해질 것이다. 천하의 영웅 중 조조보다 나은 자는 없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찬의 유언 덕분에 이응의 자손들은 난세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2. 1. 전기

효렴으로 추천되어 사도 호광에게 초청받아 시험 성적이 우수하여 청주 자사까지 승진했다. 그의 지휘 하에 있던 태수현령은 그의 위엄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능력에 두려워하여 많은 수가 사임했다.

이후 다시 초청받아 어양 태수, 촉군 태수로 영전했지만, 어머니가 고령이라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잠시 후 호오환교위가 되었다. 선비족이 자주 변경을 침입했지만, 그때마다 화살과 돌을 피하며 격퇴했다. 그 때문에 선비족은 그를 몹시 두려워했다.

그러나 공무 사건으로 면직되어 륜씨로 돌아갔다. 서당을 열어 가르쳤는데, 가르침을 청하는 자가 항상 천 명 정도였다. 후한의 순상은 그를 만나 그 자리에서 그의 어자를 맡았고, 집에 돌아와 기뻐하며 "오늘 처음으로 이군의 어자가 되었구나"라고 말했다.

영수 2년 (156년)에 선비족이 다시 운중을 침략했다. 환제는 이응이 유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불러 도료장군에 임명했다. 강족, 소륵, 구자 등 서방의 여러 부족이 자주 침략하여 장액, 주천, 운중의 여러 군의 백성들이 고통받았다. 이응이 도착하자, 오랑캐들은 공격 전에 끌고 간 남녀를 모두 변경으로 돌려보냈다. 이로 인해 이응의 명성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2. 2. 중기

159년, 이응은 소환되어 하남윤에 임명되었다. 완릉의 호족 양원군은 북해 태수를 사임했지만, 관물 횡령 죄를 거듭하여 군의 숙소와 변소까지 사치스럽게 꾸몄다. 그는 사임할 때 그러한 물건들을 차에 싣고 가져갔다. 이응은 상소를 올려 양원군의 죄를 조사하려 했지만, 양원군은 환관에게 뇌물을 보내 오히려 이응이 죄를 묻게 되어 좌교에서 고역 죄인이 되었다.

사례교위 응봉이 이응을 변호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옛날 진의 사자가 초를 방문했을 때, '보물을 보여주세요'라고 하자, 초의 소혜휼은 현신들을 줄지어 세우고, '이것이 초나라의 보물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양의 혜왕이 의 위왕에게 마차 12대를 비추는 야광 구슬을 자랑했을 때, 위왕은 '나의 보물은 4명의 명신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충의로운 현인, 용맹한 장군은 나라의 복심입니다."

응봉은 이어서 이응 등이 법을 굳게 지키고 사악한 신하를 잡아들였으며, 그들을 효수해도 불만을 품는 자가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또한 계손행보가 기의 태자를 추방한 일과 이 16명의 현인을 등용하고 4명의 악인을 퇴치한 고사를 언급하며 이응 등의 공로를 강조했다. 응봉은 황제에게 이응 등이 참소를 당해 억울하게 죄를 받고 있다고 호소하며, 정치의 요체는 공로를 기억하고 과오를 잊는 데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전한 선제가 한안국장창을 용서하고 발탁한 사례를 들며, 이응 등을 용서하여 변방의 방위에 충당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응봉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이응은 형을 면제받고 다시 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그때 환관 장양의 동생 장삭은 야왕 현령이었는데, 욕심이 많고 잔인하여 임산부를 죽이기까지 했다. 장삭은 이응의 검찰이 엄격하다는 소식을 듣고 죄를 두려워하여 경도로 도망쳐 형 장양의 집에 숨었다. 이응은 이를 알고 이졸을 이끌고 가짜 기둥을 부수고 장삭을 끌어내 낙양의 옥사에 가두고, 자복을 받자마자 죽여 버렸다. 장양은 황제에게 동생이 무죄인데 죽임을 당했다고 호소했다. 황제는 이응을 불러 즉시 사형에 처한 이유를 따져 물었다.

이응은 진 문공이 의 성공을 사로잡아 도읍으로 보낸 고사를 언급하며, 공자가 이 처치를 좋게 평가했다고 변론했다. 또한 예기의 내용을 인용하며 공족이 죄를 범했을 경우 군주가 용서하라고 해도 역관은 율례를 방패 삼아 양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응은 자신이 관직에 오른 지 10일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폭로하고 사형에 처하는 것이 늦어질까 두려워했으나, 오히려 너무 빠르다는 책망을 받았다며 자신의 부주의를 인정했다. 그는 기한 내에 원흉을 모두 잡아 죽이고 가마솥에 삶아지는 것이 자신의 소원이라고 밝혔다.

황제는 장양에게 "이것은 네 동생의 죄다. 사례가 한 일, 아무것도 잘못된 게 없다"라고 말하고 내쫓았다. 이 일이 있은 후 황문, 상시 (모두 환관)는 모두 허리를 굽히고 숨을 죽였으며, 휴가일에도 후궁 숙소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황제가 이상하게 여겨 묻자, 모두 "이 교위님(이응)이 무서워서요"라고 말했다.

당시 조정에는 환관이 횡행하여 정치와 질서가 엉망이었다. 그러나 이응만은 자신의 신의를 지켰다. 선비로서 그의 출입이 가능한 자가 있으면, "'용문에 등용되었다'(등룡문)"고 불렀다[3]

2. 3. 만년

166년, 1차 당고의 금이 일어나 성진 등이 살해되고, 이응, 두밀, 진상 등 200여 명이 투옥되었다. 태위 진번은 이응 등이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이라고 옹호하며 서명을 거부했지만, 황제는 크게 노하여 그를 면직시켰다. 환관들은 이응 등의 진술에서 환관 자제들이 언급되자 불안해져 황제에게 사면을 건의했고, 167년 이응은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1]

순상은 이응이 명성이 높아 화를 입을 것을 걱정하여 절개를 굽혀 난세를 헤쳐나가도록 편지를 보냈다.[1]

몇 달 후 환제가 죽고 진번이 태부가 되고 대장군 두무와 함께 정치를 맡게 되자, 이들은 환관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이응은 장락소부가 되었다. 그러나 168년, 두무, 진번 등이 살해되고 이응은 다시 야인이 되었다.[1]

169년, 장검의 사건으로 당인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고향 사람들은 이응에게 피신을 권했지만, 이응은 신하의 절개를 지키겠다며 조옥에 자수했다. 그는 고문을 받고 죽었으며, 그의 처자식들은 변방으로 이송되었고, 문인, 하인, 부형들까지 금고형에 처해졌다.[1]

이응의 아들 이찬은 동평군 동평국의 상(相)을 지냈다. 이찬은 조조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임종 시 아들 이선(李宣) 등에게 조조에게 의탁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찬의 유언 덕분에 이응의 자손들은 난세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2. 3. 1. 당고의 금

166년, 1차 당고의 금이 일어나 성진 등이 살해되고, 이응, 두밀, 진상 등 200여 명이 투옥되었다. 태위 진번은 이응 등의 기소장이 삼공에게 보내졌을 때, "지금 조사받는 사람들은 모두 천하가 칭찬하는 자들이며,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이다. 이들에게 죄가 있다고 해도 10대 후손까지 사면해야 마땅하다. 죄명이 아직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체포하여 고문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말하며 서명을 거부했다. 황제는 크게 노하여 그를 면직시켰다. 환관들은 이응 등의 진술 속에서 자주 환관 자제들이 언급되자 불안해져, 황제에게 천변을 이유로 사면하는 것이 좋겠다고 간청했고, 167년 석방되어 이응은 고향으로 돌아갔다.[1]

순상은 이응이 명성이 높아 화를 입을 것을 걱정하여 절개를 굽혀 난세를 헤쳐나가도록 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1]

수개월 후 환제가 붕어하고, 진번이 태부가 되고 대장군 두무와 함께 정치를 맡게 되자, 두 사람은 협력하여 환관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그리하여 많은 천하의 명사들을 등용했다. 이응은 장락소부가 되었다. 그러나 168년, 도리어 두무, 진번 등 두 사람이 살해되고, 이응은 다시 야인으로 돌아갔다.[1]

169년, 장검의 사건이 일어나 당인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고향 사람들은 이응에게 "피하십시오"라고 권했지만, 그는 "임금을 섬기면서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죄가 있으면 형벌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절개이다. 나는 이미 예순인데,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 도망가서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조옥에 자수했다. 그는 고문을 받고 죽었다. 그의 처자식들은 변방으로 이송되었고, 문인, 하인, 그리고 그의 부형들까지 금고형에 처해졌다.[1]

2. 3. 2. 이응의 아들

이응의 아들 이찬은 동평군 동평국의 상(相)을 지냈다. 이찬은 조조가 아직 미천하던 시절, 조조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임종 시 아들 이선(李宣) 등에게 "세상이 곧 혼란해질 것이다. 천하의 영웅 중 조조보다 나은 자는 없다. 장막은 나와 사이가 좋고, 원소는 너희 어머니 쪽 친척이지만, 그들을 믿지 말고 반드시 조조에게 의탁하여라."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찬의 유언 덕분에 이응의 자손들은 난세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3. 전기 자료

이응에 대한 전기 자료는 후한서 권67, 〈열전〉57, 이응 이다.[1]

3. 1. 후한서 이응전

후한서 권67, 〈열전〉57, 이응

참조

[1] 서적 詩』大雅烝民
[2] 기타
[3] 기타
[4] 서적 후한서》 권8, 〈제기〉8, 영제(靈帝) 2년(169) 10월 19일(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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